나의 이야기

From Now On

대낮의호롱불 2008. 8. 30. 07:57

From Now On

 

 

  조석으로 선선해지니 농삿일이 밀리는 꼴을 보다못한 아내가 눈치를 줘도 왜 날 뙤약볕 내리치는 사지로 못 보내서 안달이냐고 따지지도 못할 처지입니다.

워낙에 게으르고 허약하다 자처한다지만, 동네를 나서면 벌써 가을 농사가 시작되어서 한쪽에선 무 배추를 심고, 다른 한쪽에선 도라지를 캐거나 참깨대를 널거나  말린 담배잎을 정리하느라 분주한 모습이 눈앞에서 총천연색 씨네마스코프로 펼쳐지는데 일하는 시늉이라도해야 할 형편입니다.

벼르다 어제 오후 집안 예초를 시작으로 나로선 가을 농사일이 시작된 겁니다. 앞으로 할 일들을 머리속에 쭈욱 늘여뜨려 보자니 갑갑함과 설레임에 가슴이 콩닥거립니다. 대입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작년처럼 델라웨어 농사만 했다면 시간이 남아 돌아 매일 밤낚시에 낮잠으로 소일했겠지만, 올핸 변변히 낚시 한번 못했습니다. 담배를 끊어서 시큰둥 해진 탓도 있지만 작년에 심은 세 종류 포도를 7월 말부터 지난 주까지 수확하느라 맥이 빠졌습니다.생각만큼 농사가 되지않아 내년농사가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농사가 잘되면 농사가 쉬운 것이고, 아무리 애를 썼어도 농사가 안 되었다고 생각되면 농사만큼 어려운 것도 없어 보입니다. 제대로 하기전엔 한발도 더 나서지 않겠다는 다짐도, 그동안 내심 쌓아 놓은 자긍심도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포도를 맛본 지인들이 한결같이 맛있다 하니 그로써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입니다 . 설령, 립서비스라 할지라도 어느 농부가 그런 소리 들으면 기쁘지 않겠나요?  까짓것 어차피 뛰어야 할 경주라면 핸디캡경주도 한번 해볼만 합니다.

 

  어제 모처럼 예초기를 내둘렀던 탓에 허리병이 살짝 도진듯 해 종일 파스 붙이고 여전히 한낮엔 열기가 남았다는 핑계로 집에 머물면서 농산물 품질관리원에 새로 심은 포도 친환경인증 여부를 문의 해봤는데, 무농약 재배 인증이어서인지 우선 토양분석, 수질분석해서 적합 여부가 판명된후, 절차에 따라 진행한다고 엄격한 어조로 답합니다. 공무원 답습니다. 아무튼 저농약인증 받을 때보다 세심히 살필 기세입니다. 일주일쯤 후에 재배 포장을 방문한다하니 부리나케 풀을 베야겠군요.가혹한 형벌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도 오늘밤  작년서부터 벼르고 벼르던 블로그를 만들어서 이렇듯 엉성한 글줄이라도 쓰게될 줄이야. 세상과 적당히 결별해서 살겠다는 마음이 농사를 택한 이유들 중 하나였는데 가끔은 그곳에서 도태된 느낌이 들때는 멍해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시작이 반이다란 말은 멋진 표현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난 새로운 선택을 한겁니다.  

                                                                                                                                                                                                                   - supertram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