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Blooded
Hot Blooded
얼마 전 새로 부임한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가 이미 70년대 중반에 피스코(Peace Corps,평화 봉사단) 일원으로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은 사실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중학교 2학년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 영어 선생님이 낯선 이방인을 데리고 수업 시간에 들어 오셨다. 선생님은 그를 미 평화 봉사단원으로 우리 학교에 배치 되어 영어를 가르치기로 했다며 그를 소개했다.
이름이 기억나진 않지만, 훤칠한 키와 금발머리에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콧수염을 기른 그는 캘리포니아의 어느 대학을 나왔고, 그의 아버지는 파나마 대학 교수이며, 한국전쟁이 생각나 봉사 하고자 피스코의 일원으로 우리나라를 택하게 되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어린 내가 봐도 첫 모습에 자부심이 배어 났다.
그후 우린 그를 그냥 피스코라 불렀다.
영어 선생님이 학과 진도를 절반 가량 하고, 나머지 시간은 피스코의 몫으로 진행되었는데, 우리의 수준을 감안하여 주로 영어 단어 공부를 위한 빈 칸의 영어 철자를 알아 맞추는 행맨 게임( Hangman game ) 과 발음 교정으로 할애 했다.
당시, 내가 살던 바로 옆 집에 얼마전만 해도 내내 미국인 선교사 가족이 살았고, 근처에 선교사들이 제법 살고 있어서 외국인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어린 내가 여기기에도 그의 자부심은 지나쳤다.
수업 도중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미국이 세계 최고라고 종종 우쭐댔다.
오죽하면 그가 입버릇처럼 한 세컨드 투 넌( Second to none )이란 말을 기억할까.
우리 말로 옮기는 영어 선생님의 편치 않은 웃음이 생각난다.
언젠가 발음 시간에 교과에 나오는 서울( Seoul )을 발음하도록 시켰는데 한 친구가 끝끝내 서울을 소울이라 발음하지 않고 서울이라 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나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흥분했는데, 그 친구는 당돌하게도 계속 우리 서울을 왜 그렇게 부르라고 강요하느냐고 대들어 가까스로 영어 선생님이 진정시켰다.
그 친구와 난 집 방향이 같아 피스코 비웃는 일로 하교길의 지루함을 달랬다.
얼마 지나 난 정규 수업시간외로 열 댓명으로 이뤄진 소위 스페샬 클래스에 들어 갔다. 요즘 영어 조기교육이다해서 오로지 제 자식 교육에 몸 바치는 상당수 젊은 부모들에게는 부럽기 조차 할 당시의 내 처지는 그저 담담했다. 아니, 방과후 또래 와 놀 시간이 줄어 내심 짜증나는 쪽이었다. 집에 가서 형들에게는기색도 안했다.
방과후 매일 한 시간 가량 학과에 상관없이 프리 토킹으로 이뤄 졌다.
물론, 지난 대통령직 인수위원장님 말씀대로 오렌지는 아륀지로 발음하라더군.
친절하게도 당시 피스코는 재량으로 스페샬 클래스 멤버 모두에게 새로 이름을 정해 줬는데, 당시 내 이름은 노바디가 아니고 John이었다.
원래 내 이름이 없어진 것도 아니니 창씨개명은 아니지만 그래도 찜찜한데다가 평범하기 그지 없는 존이라니. Be good Johnny !
아무튼 피스코는 그 해 내내 영어 시간과 방과후에 만났지만, 3학년이 되고 본격 고입 시험에 내몰려 그의 존재는 새까맣게 잊게 되어 언제 본국으로 돌아 갔는지 알 수 없다.
미국을 둘도 없는 은인으로 아는 군사정권과 -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하자 당시 케네디는 한국을 고립시키려 하였으나, 한일 관계 개선, 대통령 선거와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 실시 약속과 미국이 베트남 침략의 빌미를 얻기 위해 저지른 '통킹만 사건'이 있기 이미 수년 전 향후 베트남 참전 약속을 받고 그를 백악관으로 불러 들여 정당성을 부여했다 - 케네디의 자신만만한 프론티어정책 덕에 난 특별한 경험을 했다.
무슨 잘 알지도 못하는 국제 정치의 역학관계를 말하고자 꺼낸 얘기는 아니다.
랑케(Lanke)의 말마따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던 융성한 고대 로마 제국도
세계를 제패하고 그 정복욕을 가눌 길 없어 콜로세움에서 잔인한 살상극으로 대리만족하다 향락에 취해 망해가지 않았던가.
아시아의 조그만 섬나라 일본도 호시탐탐 대륙을 엿보며 '대동아 공영'이란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 전쟁을 일으켰다 원자폭탄 세례를 받지 않았는가.
2차대전 후 세계 패권을 거머쥔 미국도 '팍스 아메리카'를 외치며 조정자를 자처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세계 곳곳에 도발을 서슴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즐기는 아메리칸 풋볼도 알고 보면 금긋고 땅따먹기 하는 놀이다.
Go West ! 를 외치며 서부 대륙을 개척한 미국인들도 향수에 젖어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싸늘한 시선으로 맞짱 뜨던 리 반 클리프보다 못한 텍사스 얼뜨기 카우보이를 두 번씩이나 대통령으로 뽑아 주지 않았나.
중국의 티벳 무력 진압이나 '동북아 공정'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구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시련을 겪던 러시아도 푸틴이 집권한 후 다시 국운이 살아나자 차마 누구 마냥 헌법을 뜯어 고쳐 계속 해 먹기에는 모양새가 안나니까 궁리 끝에 들러리 대통령을 앉히고 몸소 2인자의 자리로 물러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우스꽝스런 꼴을 모두가 모른체 하지 않는가.
경제 대통령이 되겠다는 언론플레이에 먹고 살기 힘들다고 80년대 사회 변혁의 주체까지도, IMF체제로 혹독한 시련을 겪은 자영업자들도 순진하게도 삽자루 든 조국 근대화의 기수를 밀어 줬는데, 이 땅의 부자들이 설령 경제가 살아나면 과연 뒷짐지고 바라만 보겠는가. 그 분들 식사가 성대히 끝나야 비로소 설거지하며 밥풀이라도 얻어 먹지 않겠는가.
자국민의 우월주의에 바탕을 둔 배타적 민족주의나 팽창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언젠가 우리도 더 강해지면 비굴한 사대주의 대신 우리의 우월한 힘을 과시 못해 안달일지도 모른다. 당장 좀 살만해 졌다고 싸구려 해외 여행 가서 버르장머리없이 구는 꼴에서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들 머리에 그럴듯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폼나는 완장 하나 채워 주면 새 세상 만난듯 사람을 쥐잡듯이 할게다.
그만 해야 겠다. 별안간 분에 못이겨 횡설수설 했다. 다혈질이 되었나.
오늘 시류에 맞지 않는 뜬금없는 얘기로 주제넘게 군 것 아닌지 모르겠다.
- Foreig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