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빵 스물일곱 개
다시 해가 바뀌었다.
내 여생이 얼마인지 몰라도 더 열심히 농사 짓고 책도 많이 볼 생각이다.
남은 시간도 똑같이 소중한 시간이다. 난 한때 룸펜처럼 너무나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가.
무슨 재밌는 경기나 연속극을 기다리며 마냥 시간을 흘려 보내기엔 내 자신이 안타깝다.
지난 농사를 마치고 대충 치워놓고 좀 쉬자니 몸이 여기저기 아프다.
노안이 온뒤론 책을 보려면 안경을 벗고 맨눈으로 보자니 여간 피곤한게 아닌데 얼마전 안압이 높아졌는지 눈알이 쏟아질듯 아파서 혹시 10여 년 전의 중심성 망막염이 도진게 아닌가 걱정하다 이내 진정되기에 읍내 안경점에 가서 근시가 든 돋보기 안경을 끼고 보니 신천지가 열린듯 하다.
이제는 책을 보아도 책장을 넘기며 방금 뭘 읽었지 하기 일쑤다.
하지만 오래전 대학시절 어느 교수가 독서할 때 내용을 기억하는데 너무 집착하지 말고 잊어버린다는 마음으로 읽는 것도 괜찮다는 말이 떠올라 위안 삼으며 책을 뒤적인다.
학생시절 시험기간이 되면 며칠 독서실에 들어가 안광이 지배(紙背)를 철(徹)하도록 달달달 외우고 행여 누구랑 부딛치면 고생해 외운 게 달아날까봐 조심스레 시험장에 들어가 시험지를 받자마자 정신없이 쏟아붓고 만세 부르고 폭음을 한 기억이 선한데 이제 그렇게 책을 볼 필요도 없다.
( 아 근데 글쓰기 제목이 계속 맘에 걸리네. 거창해서 마음이 옴짝달싹 못하겠네. 지금이라도 바꾸고 쓸까.
그럼 제목을 上善若水에서 '건빵 스물일곱 개'로 고쳐 쓴다.)
통혁당사건으로 사형선고후 무기로 감형된 신영복 선생이 감옥생활을 잡범들과 함께 대전교도소에서 할 때 에피소드중 자칭 조목사란 작자가 입소했는데 인사차 영치금으로 한 방에서 생활하는 동료들에게 건빵 한봉지씩을 돌리기에 잔뜩 기대했는데 후로는 쌩까고 자기만 건빵을 먹더란다. 그래도 제딴은 양심적이라 밤에 잠들때 이불속에서 소리나지 않게 건빵을 충분히 침에 적셔 소리나지 않게 먹었는데 다음날 아침 점호때 한 친구가 신선생에게 다가와 슬쩍 말하더란다. 조목사가 간밤에 건빵 스물일곱 개 먹었어요 라고.
침을 삼키며 그가 몰래 건빵을 몇 개 먹는지를 센 자가 어디 그 친구뿐이겠는가.
덧붙여 말한다면 부와 명예와 지위와 권력을 위해 남앞에 나선 자들은 각별히 조심하고 수양하라
당신곁의 누군가는 항상 지켜보고 있다. 게다가 배 고픈건 참아도 배 아픈건 참지 못하는 우리 아닌가.
구랍(모처럼 써보는데!) 20일께부터 블루베리 전지를 시작했는데 돌아보니 할게 아직 한참 남아 헛웃음이 난다. 심리적으로 느슨해진 탓도 있거니와 혼자 밭에 나와 일하는게 능률도 떨어지고 산만하기 일쑤다.
얼마전 대추토마토를 내달 상순에 심을 양 모종을 주문하고는 쫓기는 마음에 조금 속도를 내고 있다.
이제부터는 토마토 심을 자리의 속비닐도 씌우고 밑거름 자재도 뿌려야 한다.
신경이 곤두서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농사일도 알고보면 육체노동보다 정신노동 비중이 훨씬 높다고 여긴다. 음악가처럼 섬세해야 한다
나는 작물을 심는 전후 보름정도의 기간이 농사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여긴다.
문제가 생기면 잘 수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세상사도 이럴때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긴 하더만) 미리 잘 살펴서 문제없이 저절로 되듯 농사짓는게 더 큰 능력이다.
농사 지은지 20년이 되었지만 솔직히 농사란 무엇인가라고 가끔 자문하면서 선뜻 답하지 못한다.
게다가 난 자급자족이 아닌 상업농으로서 상품인 농산물을 생산하는 입장이다보니(전락?) 농사일이 순수하지 못하고 머릿속이 늘 소란스럽다. 농사 지은 것을 팔아서 먹고 산다는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한 달쯤 되었나 외출한 아내가 늦는다기에 조금 일찍 들어와 밥을 안치고 tv를 켰다가 우연히 영국 드라마 '다운튼 애비'에 꽂혀서 매주 토요일 오후를 기다린다, 얼마만에 재밌는 드라마 한 건 건진건가.
근데 얼마전에 시즌6을 마지막으로 종영했다는데 지지난주에 시즌2인가를 마지막으로 재방송 하고 있다.
아니 윷이 나와도 시원찮을 판에 빽도라니 웬말인가. ebs는 각성하라 각성하라.
기억을 더듬으면 오래전 우리를 즐겁게 한 페이톤 플레이스, 용감한 린티, 제5전선, 5-0수사대, 홀쭉와 뚱뚱이 소동, 스타스키와 허치, 초원의 집 등의 계보를 이을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다.
일요일 오전이면 식구들이 모여 로라와 메리 잉걸스 가족 얘기를 흐뭇하게 봤던게 지금도 선하다.
부디 끝까지 온전히 방영되길 고대한다.
살면서 자신할 수 없는 것중의 하나가 농사일이다.
포도농사를 접고 다시 한 토마토 농사가 지난 2년간 그럭저럭 괜찮았다. 다행스럽고 감사할 일이다.
블로그를 만든 이후 내가 농사 지은 걸 몇 분에게라도 보내드리고 싶었는데 포도는 택배가 여의치 않은데다 좋지않은 일로 나무를 베기로 맘먹으니 여유가 없었고 다시 하는 토마토는 어느정도 농사가 될지 자신이 없어서 차마 말을 못 꺼냈다. 게다가 아내는 이렇게 해봐야 얌체같은 사람이 받아갈테니 굳이 하지 말란다.
그래서 지금 생각에는 "만약 스스로 여기기에 보낼 만큼의 농사가 된다면" 6월 경에 예닐곱 분 정도에게 토마토를 조금씩 보내드리려 하니 미리 그리 아시기 바란다.
물론 경찰관 입회하에 엄중히 선정할 예정이다.
흐르는 물처럼 살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