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Lady

대낮의호롱불 2008. 11. 23. 21:57

LADY

 

   아마도 한여름에 새로 심은 포도를 수확하느라 꾸부정하게 어정쩡한 자세로 일한게 화근이 되었나 싶다. 후로 별 탈없이 지내서 마음을 놓았는데, 며칠만의 일로 허리병이 도져 앉아서 세수는 커녕 화장실 가기도 힘들 지경이고 다리가 저려 운전도 못하고 조금씩이라도 일은 해야 겠기에 걸어서 하우스까지 왔다 갔다 했더니 사정은 더 나빠지기만 했다. 

우연찮게 동네를 지나다 잘 아는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얘기 중에 자기도 허리 아파 고생하다 침 맞고 나았다고 꼭 그 병원 가보란다.

근 일주일을 파스로 허리를 도배하고 쉬고 가벼운 운동을 해봐도 차도가 없어 초조해지기 시작한터에 병원가보자는 아내의 집요한 성화도 있고 해서 못이긴 척  시내에 있는 병원을 하루 걸러 다닌지 거의 2주가 되어 간다.

병원 가는 날은 반나절은 공을 치니 하릴없이 시간만 축내는 기분이다. 그래도 많이 좋아져서 운전도 하고 PC앞에 앉아 이렇게 글도 쓴다. 절대 무리하지 말라지만 닥친 일은 안 할 수 없어 쉬엄쉬엄 포도나무 전지 중이다.

새삼스런 얘기지만 아파야 평소 탈없이 지낸 것을 절실히 감사하게 된다. 

다행히 용케도 몸이 호전되니 병원 다닌 수고가 아깝지 않다.

 

  그저께 치료를 마치고 시내에서 집으로 오는 버스를 정거장에서 기다리는 중인데 옆의자에 나이 든 아주머니가 짐을 든 채로 앉으려다 반석같던 의자가 부러지는 바람에 아주머니는 그만 엉덩방아를 찢고 말았다.

멍하니 있다가 곁눈으로 사태를 짐작하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어디선가 아가씨가 나타나 재빨리 아주머니를 일으키고 짐을 받고 몸을 털어주며 상냥한 어조로 안부를 묻는다. 교련 시간에 일사불란하게 구급법을 하는 여학생과도 같았다.( 젊은 친구들은 교련을 모를테니 스튜어디스의 비상탈출시 구명조끼 입는법 시연하는 모습이라고 해두자.) 

 킬러와 같은 본능으로 민첩하게 훑어 보니, 갓 스물쯤 되어 보이고 유니폼을 입은 품새가 근처의 금융권 회사에 다니는 사회생활 초년생인 듯하고, 외모는 세련된 도회풍이라기보다는 다소 컨트리풍(?)에 가깝고 이름 중에 영(英)이나 숙(淑), 복(福)자가 들어 있을 법한 순박하고 단정한 차림이다.  (사십대도 아니고 요즘에 약간 촌티나는 이런 이름을 갖고 있을리야 만무하겠지만)  

아가씨는 한동안 아주머니 곁에 있더니 상황이 진정된 것을 안도하듯 확인하고  겸연쩍은듯 미소지으며 종종 걸음으로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차창밖의 들녁을 바라보고 있자니 전에 회사 다닐 적 생각이 났다. 

말이 사무직이라고 화이트 칼라지 사실은 블루칼라에 가까운 그레이 칼라였다. 

특히나, 나 역시 신입 초기시절은  대부분의 시간을 복사나 업무 협조전 돌린다고 타부서를 기웃거리거나 짐짝 같은 것을 나르거나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거의 저녁마다 온전히 술에 절었다.

나는 줄곧 모 식품회사 마케팅부에서 근무했다. 내 두번째 직장이었다.

내 소속은 제품을 기획하고 관리하는 PM( Product Manager)이었지만, 이제 막 Assistant Manager 수업을 받는 처지에서 우리 과(課)가 시장조사과에 의뢰한 소비자 기호조사에 가끔 동원되어 살벌한 사무실 분위기를 벗어 나는 기쁨도 잠시 맛보았다.

PM이 기획 의도한 대로 연구소에서 타겟의 취향에 맞게 제품이 만들어 졌는지를 1차적으로 확인하고 보완점을 찾는 조사인데, 하이틴 소구 대상의 제품도 많이 기획하는지라 여고도 자주 출입하였다.

학교에 섭외에 응한 댓가로 약간의 사례를 하고 교실에 들어서면 먹을거리 들고 왔다고 어색하게도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를 들으며 입장하는 경우도 있고, 제 수업 시간이 아니라고 도떼기시장처럼 아수라장이 되어 진정시키느라 곤혹스런 경우도 있다. 나 역시도 인문계 고교 출신이지만 인문계 고교는 이처럼 대부분 분방했다.

 가끔은 실업계 고교에도 갔는데,(나쁜 일이 아니니 학교를 밝혀도 무방하겠지) 몇번 쯤 서울여상에도 갔었다. 조사는 예외없이 신속하게 잘 이뤄졌다.

학생들의 진지하고 예의바르고 밝고 맑은 모습에 내가 교화될 지경이었다.

내가 비로소 껄렁한 회사원이 아닌 사회의 어른으로 대접 받는 느낌이랄까.

나는 아직도 교실에 가득 찬 한결같이 초롱초롱하고 순진무구하고 영민해 보이는 얼굴들을 잊지 못한다.

어쩌면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찍 취업하려 실업계를 택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그 무엇도 그들의 인생을 좌절시키지 못하리라.

 

  나야 엄밀히 말하자면 나 잘나서라기 보다 부모 잘 만난 덕에 형제들 따라 엉겹결에 대학 나왔을 뿐이다.

흔히들 대학 나오고 사회에서 성공적인 지위를 점하게 되면 제 잘난 척 각고의 노력으로 엄청난 희생기간을 겪은 듯 기고만장해 군림하려 하는 오류에 빠지지만,  따지고 보면 네오 막시스트들의 말처럼 희생기간 동안 사실은 이에 충분히 상응하는 정신적 만족과 보상을 받았기에  이들이 성실히(?) 희생기간을 견뎠다고 따로 사회적으로 보상해 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갈수록 커지는 빈부의 차이라는 것 때문에 삶의 기회가 달라지고 삶의 질을 결정짓는 일은 납득하기 힘들다.

그래도 사회는 여전히 성공신화를 만들고 아니꼬우면 너도 노력해서 이건희처럼 되라 꼬드긴다. 너도 노력해서 상류사회에 진입하라고.

모르긴 해도 내가 이병철 자식이었음 벌써 내 재산의 대부분은 사회에 환원했을 것이고, 초우량 글로벌 기업이라고 광고로 세뇌시키는 삼성을 무한경쟁을 빙자해 국가와 국민위에 군림하는 무슨 비밀 결사단체처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자본주의가 온전해 지려면 무엇보다 세습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래야 삶의 기회가 비교적 균등해 지고, 그나마 한사람 한사람이 존중 받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꿈 깨라고?  군사 정권 시절이면 벌써 사회주의자라고 끌려 갔겠지?

아니, 지금 정권의 뿌리도 거긴데, 요즘 하는 짓 보면 군복만 안 입었지 똑같잖아.

( 기야 우리가 이곳에 내려온 '96년은 문민정부 시절인데도 이곳 주민의 투철한 반공의식 덕에 학생부부간첩이 왔다는 신고로 관할 대공계 형사가 우리를 취조하는 해프닝도 있었으니 아직 이 괴리감은 극복하지 못했다. )

 

  그때 본 학생들은 지금은 이 사회 어디서 뭘 하고 지낼까.

그제 본 착하고 아리따운 아가씨 아니, 숙녀에게 이 노래를 바친다.

 

 

                                                                              -   Little River B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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